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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민족주의에 대한 강조와 공식화
1990년대 들어 중국 정부는 ‘위대한 중화민족의 중흥’을 이룩해야 한다는 민족주의 이념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서 경제발전 지상주의와 공산당 통치를 정당화한다. 이렇게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경향은 16기에 이르러 이전보다 더욱 강조되고 공식화된다.
후진타오의 경우 21세기 중국이 안고 있는 문제에 걸맞는 처방으로 내민 것이 바로 화해사회론이다. 화해사회론의 핵심은 균형과 발전이다. 덩샤오핑과 장쩌민시대에 언급하지 않았던 균형이라는 개념이 처음 등장하였다. 발전하되, 균형을 맞춰 발전하자는 것이다.
3. 중국 지도부의 대외정책의 변
중국 신식산업부의 발표에 따르면 올해 전 세계에서 생산될 휴대폰 10억대 중 4억대는 중국 제품이라는 것이다.
지금 미국과 유럽에서는 현대판 ‘황화론’이 거세게 일고 있다. 엄청난 인구, 낮은 임금, 여기에 거대한 소비시장으로 선진국은 자국 경제뿐 아니라 국제 사회에서 이들의 영향력을 우
후진타오가 당면한 시급한 "균형" 과제이다. 지금까지 중국은 지역적으로는 도시 및 동부 황해 연안지역에 발전이 집중되었고 사회적으로는 풍부한 저임금의 노동력을 이용해 세계의 공장으로 군림해왔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불균형들은 선부론, 즉 일단 충분한 경제의 외연 확대후 분배를 이루자는
중국의 미래는 여전히 밝을 것인지 점검해볼 수 있는 계기.
Ⅱ. 권력구도 변화
● 70대인 3세대 지도층에서 50-60대인 4세대 지도층으로의 세대교체가 완성.
- 당내서열 1-3위인 장쩌민, 리펑, 주룽지가 16기 공산당중앙위원회 위원 인사에서 탈락
- 후진타오를 제외한 제 15기 정치국 상무위원 중 웨이
사회주의 초급단계에서는 경제발전에 매진해야하며, 정치개혁을 할 때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이 논쟁의 흐름을 일단락 시켰다.
그리고 최근인 2010년 8월 선전을 방문한 원자바오 총리는 “정치체제 개혁의 보장이 없으면 경제체제 개혁의 성과도 잃어버리게 된다.” “개혁하지 않으면 죽음에 이
위원회 위원을 지명하여 전인대의 승인을 받는다. 국무원은 중앙인민정부라고도 하며 산하 각 성(省)과 자치구에 지방인민 정부를 두고 있다. 국무원은 중국의 최고 행정기관으로 전인대에서 결정된 중요사안을 집행하고 국가행정에 관한 법률의 결의나 결정, 예컨대 국민경제와 사회발전계획, 국가
중국으로 인정받아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북한과 중국 지도부는 다양한 상호방문을 통해 친분을 강화하고 돈독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북한과 중국이 각자의 체제안정을 위해 추구하는 경제발전 노선에 차이가 나타나고 있었고, 직접적인 갈등으로 비화되지는 않았지만 갈등의
중국사회과학원 공업경제연구실 주임에 발탁되면서 중용되기 시작하여 1987년 상하이 시장이 되었으며, 1989년 톈안먼 사건 때는 군대를 투입하지 않고 텔레비전 연설로 학생들을 자제시켜 충돌 없이 시위대를 해산시킴으로써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1991년 상하이를 방문한 덩샤오핑에게 개혁구상을